🎬 비기너스 (Beginners)
-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영화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EARTH LOG는 장면과 장면 사이, 그 여백에 남겨진 마음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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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ners.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단순히 마음을 먹는다고 시작되는 것일까.
나의 경우에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겁이 많고, 신중하고, 생각이 많다.
변화보다 안정을 택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무언가 바꾸려고 할 때는 그 안에 긴 시간의 고민과 결심이 들어있다.
나를 규정짓는 건,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착하다, 슬프다, 속물이다, 밝다—이런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물론 그 누구도 정확히 나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런 시선들 속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결국,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동시에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할은 파티를 연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존재를 명확히 한다.
서류에도 말을 걸고, 집에게 인사하고, 강아지에게는 '아서'라는 이름을 준다.
그 순간, 그것들은 '존재'가 된다.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혼자 머무는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지만, 언젠가는 그 고요함이 공허함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변화에서 멀어진다.
눈빛, 말투, 손끝의 다정함. 사랑은 그렇게 조금씩 멀어진다.
삶은 반복된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같은 음악이 다시 흐르고, 같은 길을 또 걷고,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하루에 속지 말아야 한다.
지금 행복하다고 안주하지도, 지금 아프다고 포기하지도 말자. 삶이란,
그 모든 반복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자. 시도하고 망가지자. 부딪히고 깨지고 그러다보면 단단해지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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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끝났지만, 마음은 아직 그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EARTH LOG
대표 이미지 출처: 영화 《비기너스》 공식 스틸 /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 및 배급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