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cene

59. 말 대신 시로 기록된 하루들. <패터슨>

OKEARTH 2025. 4. 23.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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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터슨 (Paterson)

- 말 대신 시로 기록된 하루들.

영화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EARTH LOG는 장면과 장면 사이, 그 여백에 남겨진 마음을 기록합니다.

 

···

도시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이 같은 영화.
《패터슨》은 말이 적은 남자와, 그가 매일 쓰는 시로 가득 찬 일주일을 보여준다.
아침엔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노선을 운전한다.
점심엔 늘 같은 도시락을 먹고, 퇴근 후엔 강아지 산책을 하며 바에 들른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말할지 모를 일상.
하지만 패터슨의 하루는 조용히 반짝이는 시로 채워져 있다.
그 시는 어쩌면 삶을 견디는 방식이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패터슨은 말을 아낀다.
버스 운전 중에도, 로라와 대화할 때도, 대부분 듣고 있는 쪽에 가깝다.
그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은,
출근 전 아침 조용한 시간이나 점심시간 버스 안에서 손때 묻은 공책에 조용히 시를 적어내려갈 때다.
그 시들은 화려하지 않다. 격정적이지도 않다.
그저 그날 본 성냥갑, 라라의 목소리, 개가 짖는 소리 같은 일상의 파편들이 한 줄 한 줄 감정의 결로 이어진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쓰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는 글이 아닌, 그냥 살아내기 위해 쓰는 시다.
패터슨의 시는 조용히 존재하며, 말 없는 마음의 증거처럼 남는다.

패터슨의 삶이 무채색이라면, 로라의 삶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동 같다.
그녀는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흑백 커튼을 만들고, 컵케이크에 도전을 한다.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하고, 꿈을 꾸는 속도도 빠르다.
패터슨은 그런 로라를 조용히 바라보고, 웃고, 응원한다.
그리고 로라 역시, 말이 없는 연인의 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감탄한다.
자신의 꿈처럼 그의 시도 언젠가 사람들에게 닿기를, 조용히 믿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애정의 결은 길다.
패터슨은 로라에게 시를 읽어주지 않지만, 그녀는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이 영화는 사랑을 ‘말’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로 이야기한다.

패터슨의 하루는 거의 변하지 않지만, 영화 후반, 그 조용한 흐름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린다.
그가 오랫동안 써온 시가 강아지 마빈의 입에 의해 찢겨 사라지는 순간.
그 장면은 목소리 없이 흘러가지만, 패터슨의 얼굴에 번진 허무함과 상실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아무에게도 탓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앉아,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보다 더 큰 침묵. 자신만의 세계가 무너졌을 때,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의 표정.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다음 날 그는 벤치에 앉아 여전히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그때 한 명의 일본인 시인이 다가온다.
그 시인은 패터슨에게 새 노트를 건네며 말한다.
"빈 페이지는 가능성이다."
말 한 마디, 노트 한 권.
패터슨은 그 작은 위로 속에서 다시 연필을 든다.
시를 잃어도, 시를 다시 쓰는 사람.
패터슨은 그렇게, 다시 살아간다.

패터슨은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거창하게 꾸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도시락을 먹고, 같은 자리에 앉아 시를 쓴다.
누군가는 그를 평범하다 말하겠지만, 그의 하루는 무너뜨릴 수 없는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묵묵히 지켜가는 삶.
그 안에 숨은 시, 사랑, 자존감. 그건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한 품격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조용히 흘러간다.
화려한 성과가 없을지라도, 매일 나를 지키며 살아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하루는 충분히 의미 있다.
패터슨처럼. 우리는 그냥, 매일 시를 쓴다.
혹은 매일 숨을 쉰다.
그게 곧,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

장면은 끝났지만, 마음은 아직 그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EARTH LOG

대표 이미지 출처: 영화 《패터슨》 공식 스틸 /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 및 배급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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